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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해우선생님은 필명 ‘유동우’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970년대 노동운동에서 그는 노동조합을 만들어 노동환경개선과 노동법준수 등을 외치며 전국의 공장지대를 다니며 노동운동을 한 실천가였다. 6,70년대를 배경으로 도시노동자로 살아가면서 겪는 노동의 삶과 노동조합운동의 경험을 담아낸 그의 자전수기<어느 돌멩이의 외침>은 본격 노동자 문학의 출발을 알리며 당시 운동권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1970년대와 1980년대를 관통하는 노동운동가로서 유해우 선생님의 삶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외침’으로 다가올까 궁금했다. 지난 11월 21일 정오 인권의학연구소 사무실로 들어서는 그는 자그마한 키에 약간 구부정한 허리, 하얗게 서리 내린 머리카락, 그리고 안경너머 차갑고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인 중년을 넘긴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카랑한 목소리는 여전히 그의 젊은 시절을 말해주고 있었다. 가벼운 식사를 나누고 대화를 이어갔다.
선생께서 어렸을 때 자라온 환경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라든지, 어려운 일을 극복하는 데에 있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궁금합니다.
청년기부터 노동운동에 헌신하셨는데,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시절 그 엄혹하던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노동운동에 참여하셨는지요. 기억나는 활동은?
선생께서는 소위 ‘학림(전국민주 학생. 노동자연맹)’사건에 연루되어 치안본부 대공분실(일명 남영동)에서 고문피해를 당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통스런 시간 동안 선생님을 버틸 수 있게 해준 것은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선생님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는지요.
(고문은 피해자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그 주변의 친지. 친구의 관계까지도 앗아가 버린다. 그래서 고문에 의한 조직사건의 희생자들은 아직도 선뜻 나서서 자신의 고문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을 유해우 선생을 통해 다시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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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소이후 가난한 노동자의 형편에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없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신체적 정신적으로 황폐화 되어갔어요. 흔들리던 이빨 4개는 이내 빠져버렸고, 갈비뼈에 금이 간 것도 석방 뒤 X-ray를 찍어보고 나서야 알았어요. 극도의 공포감과 악몽에 시달렸고, 불면증이 심해졌어요. 90년도에는 자신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사건으로 수사관이 집으로 찾아오자, 아파트 4층에서 뒤쪽베란다를 타고 도망치다 떨어져 발가락 3개가 골절상을 입기도 했어요. 자칫 목숨까지 잃을 수 있었던 무모한 탈출이었어요.”
학림사건은 1981년 전두환 정권 때 발생한 사건인데, 최근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보상 신청을 준비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늦게 신청을 하게 되셨는지, 진행하시면서 생각하고 느끼신 점과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지.
유해우 선생은 지금 이렇게 담담하게 지난 일을 반추하면서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성찰과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도 1년 전, 한 지인의 권유로 정신과적 치료와 인권의학연구소의 트라우마 치료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부터라고 말했다. 그는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 치유를 진작에 할 수 있었더라면.... 아니 지금이라도 국가가 잘못을 인정하고 그 치유에 대해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유동우 선생은 지난 11월 19일 국회에서 열린 <고문방지 및 고문피해자 보상․치유에 관한 법률안 공청회>에 토론자로 나와 고문피해 경험을 말했다. 2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나온 것이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당시의 고문피해사실을 처음으로 털어놓았다. 그가 용기를 낸 것은 고문피해자들의 삶, 특히 고문당한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다.
'학림사건' 피해자들 31년 만에 무죄 1980년대 대표적인 공안 사건인 '학림사건' 피해자들이 31년 만에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 1부(주심 이인복 대법관)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돼 7년 4개월간 복역한 이태복(62) 전 보건복지부 장관 등 24명에 대한 재심사건 상고심에서 무죄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재판부는 "피의자신문조서가 임의성 없는 자백에 해당해 증거능력을 부정하고, 나머지 증거들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계엄법 위반에 대해 "1979년 12월12일 군사반란과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해 신군부가 행한 일련의 행위는 내란죄로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해당한다"며 "이를 저지 또는 반대한 것은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범죄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등은 1981년 6월 민주운동과 저임금ㆍ장시간 노동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과 전국민주노동자연맹(전민노련)을 결성해 활동하다가 기소돼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학림(學林)사건은 전민학련 첫 모임을 서울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가진 데 착안해 '숲(林)처럼 무성한 학생운동 조직을 일망타진했다'며 당시 경찰이 붙여준 명칭이다.
2012.6.15.자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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