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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밥풀이가만난사람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 오연상 원장('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중앙의대 용산병원 내과의사)

[인터뷰]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오연상 원장('87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중앙의대 용산병원 내과의사)

 

1987년 6월 10일은 이 나라의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서 큰 획을 그은 날이었다. 하지만 어떤 역사도 단 한 번의 사건으로 결정되지 않는 것처럼, 이 날이 오기까지 아주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이 있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또한 민주화의 과정에서 일어난 가슴 저린 희생이었다. 1987년 대통령 선거가 임박했을 무렵, 전두환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높아져갔고 학생 시위는 매일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3월이 되고 대학들이 개강을 하면 다시 불타듯 시작될 학생들의 시위를 잠재우고자 전두환 정권은 무섭게도 매질을 해댔다. 대학 학생회 임원들 및 운동권 학생들이 매일 같이 경찰 대공분실로 잡혀갔다. 이 와중에 형사들이 당시 서울대학교 학생회장 박종운의 거취를 알아내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해 고문했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이 고문 중 사망했으나 경찰은 단순 쇼크사로 발표했다. 하지만 박종철 사망 직후 그를 처음으로 검안한 의사에 의해 고문의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는 신문을 타고 삽시간에 퍼져 전국을 정권에 대한 분노로 들끓게 만들었다.

 

이때 물고문의 가능성을 처음으로 언급했던 의사, 오연상 원장을 인터뷰하였다.

 

 

 

"그게 전두환 임기 말이었을 거에요. 그때 대통령이 7년 단임인가 그랬는데, 사실 박정희 대통령 때보다 전두환 대통령 때가 더 좀 안 좋았던 것 같아요. 전두환 정권으로 넘어오면 하여간 불특정 다수 마음에 안 들면 다 잡아가는 그런 시절이었거든.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 때에는 정치에 큰 관심 없는 사람들마저도 불만이 상당히 많았어요. 너무 강압적으로 권력을 휘두르니까요. 그게 최고조에 달했을 때가 1987년도인 겁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자기가 민을만한 사람을 차기 대통령으로 앉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국민 여론은 좋지 않았고 그러다보니 무리가 많이 따랐다. 지금은 상상도 안 되지만 당시엔 대통령 선거가 '체육관 선거'로 이루어졌다. 장충체육관에서 거수로 이루어지는 것이 대통령 선거였던 것이다. 그래서 1987년의 사회적 이슈는 대통령 선거를 직선제로 하느냐 아니면 예전처럼 체육관 선거를 하느냐라는 것이었다. 

 

"1월이니까, 아직은 겨울방학이었지만 개강을 하면 학생 시위가 격렬해질 것이라는 게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거든요. 그 해에 대통령 선거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학생 데모나 이런 걸 강력히 막으라는 지시가 내려왔을거예요. 당시 박종철 군이 언어학과 과대표였는데, 과대표하고 학생운동 하느라고 학사 경고 받았던가 그랬어요. 그래서 아버지께 혼나고, 과대표도 학생운동도 안하기로 했다고 아버지랑 약속을 했대요. 그 겨울방학만 지나면. 그런데 그때 공교롭게도 박종운이라는 선배가 그 하숙집에 와서 하룻밤을 피신했다 간 거야. 그래서 박종운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내려다가 이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이전에도 남영동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문 당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려왔지만, 외부의 의사가 완진을 다녀온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아마 내부적으로 처리하는 방식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때문에 아마 형사들도 박종철을 살리려고 급한 마음에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달려온 것이 아니겠냐며 오연상 원장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형사들이 보기에도 이건 너무 잘못됐거든. 학생회장 하던 박종운이 어디 갔냐고 물어보려다가 너무 사람을 심하게 다뤄서 이렇게 되어버렸으니까, 살려야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는 외부로 왕진 신청을 할 리가 없어요. 만약 그게 간첩 사건이었거나 했으면 죽든 말든 상관도 안 할 때였다고요, 그때는. 그런데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으니 그렇게 병원으로 뛰어 들어온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1987년 1월 14일 오전 11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이었다. 당시 내과의사였던 오연상 원장은 당직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연락이 왔다. 형사들이 응급실로 들이닥친 모양이었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왕진 요청이 들어와 바로 뛰어갔다. 1분도 지체하지 않았다.

 

"우리 병원 앰뷸런스를 타고 가는데 남영동 형사들이 나에게 정보를 준답시고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조사를 받언 학생이 상태가 안 좋은데 얘가 어제 술을 많이 마셨는지 목이 마르다고 해서 물을 줬다'고. 물고문 했다고 말할 수 는 없으니까 그렇게 말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얘가 물을 마시더니 억 하고 숨을 안 쉰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지금 내가 다시 생각해봐도 형사들이 나름대로 정보도 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물 때문이라고."

 

신호를 무시하고 앰뷸런스가 달려 5분도 걸리지 않아 어느 큰 벽 앞에 도착했다. 한 형사가 무전을 치더니 벽이 열렸다. 신기해서 창문으로 보니까 밑에 기차 철로같이 레일을 만들어 놓고 그 벽이 전체적으로 레일을 따라서 이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벽의 바깥쪽은 회반죽을 발라 놨는데 안쪽은 철판이었다. 그곳이 말로만 듣던 남영동 대공분실이었다.

 

"아, 여기 들어가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그때부터 의심스럽더라고요."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도 심상치 않게 생겼다고 하다. 건물에 창문이 없고 빛이 들어오게끔 만든 길쭉한 틈만 있었다. 3~4인이 타면 가슴이 닿을 정도로 작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복도를 지나가는데 양쪽으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들어가 보니까 책상도 있고 의자 두어 개 있고, 평상 같은 게 있어서 거기 누울 수 있게 되어 있고, 그리고 저 안에 있는 그 틈새쪽(창가쪽)으로 욕조가 보이더라고요. 바닥에 물 천지였어요."

 

당시 박종철이 속옷만 입은 채로 온 몸이 몰에 젖어 평상 위에 누워있었다. 오연상 원장은 '이거 심상치 않구나. 이렇게 물바다가 될 정도면 말로만 듣던 그 물고문을 했나보다'하고 직감했다고 한다. 동공반사도 보고 호흡 여부도 확인해 보았는데 박종철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희망은 없었지만 30분가량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는 않았다. 형사들은 장비 부족 등을 이유로 중앙대 병원으로 박종철을 옮기자 했다. 반대 의사를 표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라 아무 말도 못하고 대신 병원에 전화를 걸어 불필요한 처치를 막앗다. 박종철의 시신은 경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날 오후에 내가 진료가 있었는데, 오후 한 4시쯤 돼서 아까 본 형사 중 한 사람이 왔더라고요. 사망진단서 써달라고. 내가 사인을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다 '미상'으로 써야하는데 그래도 좋겠냐고 물었더니 상관없대요. 쓰기만 하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다 '미상'이라고 썼지요. 심증은 있지만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까 정확히 알 수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사망 진단서를 써줬어요. 그 형사가 그걸 받다니 혹시 신문이 시끄럽고 귀찮게 굴지 모르겠으니까 우리가 보호를 좀 해주겠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 순간부터 감시가 시작된 겁니다. 진료실 앞에 형사가 앉아있더라고요."

 

그날 오연상 원장이 썼던 그 사망진단서를 당시 법원에 출입하던 중앙일보 기자가 발견한다. 사망 장소가 남영동 대공분실이고 사인이 미상으로 나와 있는 점을 보고 이상하다고 느끼 기자가 그를 찾아왔다.

 

"아마 진료실 안으로 들어와서 만나려고 했으면 당연히 안 됐을 거예요. 형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 그래서 내가 화장실에 갔을 때 따라온 거예요. 그게 참 다행이었던 것이, 진료실이 화장실에서 3m 떨어진 곳에 잇었는데 만약 멀었다면 형사들이 쫓아왔겠죠. 그런데 가까우니까 형사가 따라오지를 않는 거야. 그리고 화장실에서 그렇게 1분 동안 기자와 얘기를 했어요. 그냥 사실 확인 정도였죠."

 

 

그리고 그날 석간 중앙일보에 짤막한 기사가 실린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 군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받다가 사망하였다." 정말 간략한 사실만 실렸지만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그 다음날 한 10시쯤 병원에 갔는데 밖이 와글와글해요. 형사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소용없었어요. 기자들이 한 30명 온 거예요. 그냥 다 밀고 진료실로 들어온 거예요. 기자 분들이 막 질문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본바대로, 정직하게 말했어요. 형사들이 말하기를 박종철이 물을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니까 물고문해서 죽었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래도 일단 내가 가능한 데까지는 했어요. 가능한 물과 관련된 얘기들을 많이 하는 거죠. 사실 죽은 사람에게서 들리는 수포음의 경우엔 의학적으로 물고문과는 상관이 없어요. 그래도 주로 물과 관련된 것을 상기시키려고 일부러 말을 했던 거예요. 물을 많이 먹었다고 하더라. 갔더니 바닥이 물천지이고 박종철 군이 물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젖어있더라. 그 앞에 보니까 욕조가 보이더라. 심폐소생하려고 삽관 하고 들어보니까 수포음이 들리더라. 뱃속에 물이 많이 들어갔는지 촉진해보니까 꿀렁꿀렁하더라. 그때 동아일보 기자가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어보더라고요. 바닥에 물이 있었냐. 결정적으로 그걸 물어보더라고요. 그래서 물이 많았다고, 내가 그때 가운을 입고 갔었는데 그때 그 가운이 흙탕물에 젖어서 가운을 빨아야 했을 정도로 그렇게 되었다고 대답했어요."

 

그리고 일주일가량 조선일보를 제외한 모든 신문이 그 기사만 써댔다. 12페이지에 실린 기사 모두, 만평에 칼럼까지 모두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뤘다. 보도지침이 있던 시절이었으나, 이 사건만큼은 반드시 써내야 한다는 언론인들의 양심이 두려움을 이겨냈으리라.

 

그 다음날부터 오연상 원장은 검찰 수사에 형사 심문에 시달려야 했다. 병원 앞 그레이스 호텔이라는 곳에 갇혀 같은 내용을 100번도 더 물어봤다고 한다. 도중에 조금이라도 말이 바뀌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였다. 검찰에게서 풀려 집에 가는 길에 집 앞에서 기다리던 신길동 대공분실 형사들에게 연행되어 다시 조사를 받았다. 두려움도 일었지만 거짓 자백을 할 수도, 할 것도 없었다. 이미 자신이 아는 것을 너무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사건은 근본적으로 내가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정치적인 사건이다 보니까 정치권에서 어떻게 결정하느냐가 중요했거든요. 그리고 나는 이미 내가 할 수 있는 말 할 말을 이미 다 했기 때문에 주워 담을 수도 없는 입장이야. 그걸 어떻게 번복을 해요. 게다가 신문기자들도 한두 신문이 어영부영 기사를 썼으면 모르겠는데 모든 일간지가 대서특필을 해놨기 때문에 주워 담을 수가 없게 된 거죠. 초장에 그렇게 되어버렸기 때문에 남은 건 정치권에서 이걸 어떻게 하느냐 그것만 남은 상태가 된 거에요. 나는 전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어요. 정치권에서 고문 사실을 인정하면 난 아무 일 없는 거고, 이 사건을 묻겠다고 결정하면 난 없어지는 거지. 그래서 두렵고 자시고 할 정신도 없었어요. 너무 전광석화처럼 일어났기 때문에 고민할 시간이 별로 없었죠."

 

만약 기자들에게 질문 받았을 때 잘 모르겠다고 눙첬다면 오히려 잡혀가서 함부로 입 놀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을 것이라고 오연상 원장은 말한다. 하지만 이미 고문은 전 국민에게 기정사실화 되어버렸고 내무부 장관이 세 번씩 바뀌는 등 온 나라가 뒤집혀있었다. 오연상 원장은 "내 말을 번복한다"고 해도 누구 하나 듣지도 않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기까지가 제 역할이었습니다. 거기까지가 제가 아는 바이고요. 그 이후로는 사건 자체가 추진력이 생겨서 사회를 변화시키기 시작했어요."

 

이후 오연상 원장은 한동안 고등학교 친구가 운영하는 호텔에 숨어서 지냈다. 혹시 도청 당할까 싶어 집에 연락도 못했다고 한다.

 

 

사회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받은 충격이 어마어마했듯이, 오연상 원장 개인에게도 이 사건이 준 충격은 상당하지 않았을까. 이 사건이 어떤 의미로 남아있는지 물어보았다.

 

"물론 진짜 정말 굉장히 어려운 결정이잖아요. 그럴 때 일수록 복잡한 생각을 하고 계산을 할 것이 아니라 있는 대로 정직하게 가야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당시 1987년 인터뷰 때에도, 내가 '어려운 문제일수록 정도대로 대처를 해야지 그냥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을 했었을 거예요. 어렵고 큰 일일 수록 정석대로 정직하게 해결을 봐야 해요. 그걸 배웠어요."

 

하지만 '의료인이기 때문에' 더 큰 역할이 부여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단언한다. 당시 자신이 했던 일은 의료인의 윤리로서가 아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의사이기 전에 대한민국 국민이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의무이자 해야 할 일이었어요. 문제는 의료인이고 아님을 떠나서, 권력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겠죠. 그러니까 뭐 우리만 그 문제가 있겠어요. 형사도 죄를 지은 사람들을 잡아서 선량한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나름대로의 신조가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일반인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해 일반 국민을 때려잡는 그런 양상이 되어서 곤란했던 거죠. 사업하는 사람이라면 정상적인 사업을 잘 해서 일자리도 만들고 좋은 물건도 만들고 여러 사람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는 것이 원칙인데, 그걸 좀 편하게 해보겠다고 정치자금을 대고 특혜를 받는 거잖아요."

 

따라서 윤리 강령이나 윤리 의식을 사회의 어느 집단이기 때문에 더 갖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각자 경험으로써 깨달은 윤리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간접경험이든 직접경험이든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해 학습을 하고, 이에 대해 본인이 사고할 능력을 갖추어야 문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결을 할 수 있다. 때문에 현재 의학 교육이나 의사들의 형식적인 윤리강령, 선언 등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윤리라는 게 삼각함수나 적분이 아니기 때문에 배웠다고 그렇게 한다는 보장은 없거든요. 의사협회나 의사들 모임에 윤리 강령 혹은 선언들이 있어도 무용지물인 것과 비숫한 맥락이에요. 신경 쓰는 사람도 별로 없죠. 결국에는 각자가 어떤 식으로 사고를 하고 살아가는지의 문제가 되는 것 같네요."

 

현재 의료인들 내에서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은, 모든 것이 돈의 관계로 환원되어버리는 점이다. 보험공단도 재정만을 걱정하고, 의사들도 수입에 민감해진다. 처음부터 비급여 항복인 미용 성형 만을 전문으로 하고 싶어서 의사가 된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며, 사실은 우리가 의사 될 적의 마음을 많이 잃어가고 있다고 의료가 상업회 된 현실을 비판하였다.

 

학생들 수업이나, 전공의 수련과정에서 자신의 경험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하였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자체가 그리 좋은 사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난 사건이라 하더라도, 분명 사람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감옥엘 갔다.

 

"지금은 그냥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굉장히 어려운 결정에 처하고 시험에 들었는데, 크게 잘못한 일 없이 헤쳐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 점은 다행이지만, 피해자가 워낙 많고 의료인으로서 만난 환자가 죽었잖아요. 만약 어떻게든 민주화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면, 박종철이 죽지 않고 살아서 민주화가 되었으면 그게 더 좋았을 거라고 아직도 생각하거든요. 난 의료인의 입장에서 그래요."

 

대통령 선거 지원 유세, 국회의원 자리와 같이 정계에서의 러브콜도 받았다. 하지만 단 한번 눈길도 준 적이 없다고 한다. 원래 내가 갈 길은 의료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최근 의사의 사회적 참여가 다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단지 의료 봉사나 보건 정책 뿐만 아니라 국가 대 국가의 협상 테이블에까지 의료인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이 커지고 있다. 그에 비해 '난 의료인일 뿐이고, 의료인으로서, 아니,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오연상 원장은 마치 한 마을을 지켜주는 오래된 수호 나무와 같은 느낌어었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 사회의 영양분이 되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시 돌이켜보면 각 분야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결국 6.10 민주화 항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언론인들은 보도지침을 이겨내고 신문에 기사를 냈고, 오연상 원장은 의료인으로서 최소한 사인은 정확해야 한다는 판단 하에 고문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각 분야의 이러한 실천들이 합쳐져 결국엔 사회가 흘러갔고, 바뀌었다. 이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그의 말과 실천처럼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 한층 더 나은 곳이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